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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의 기사와 사는 이야기/나들이길에 만난 풍경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전주 가볼만한곳]

by 한빛 (hanbit3) 201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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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과 구경꾼들로 넘쳐나던 전주한옥마을,

사람에 치일 만큼 북적이던 그곳 풍경에 크게 실망하였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바로 '경기전'이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신 곳이란다.


'어진' 은 왕의 초상화를 일컫는 말인데, 종류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의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 추사란 왕의 생존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로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다.

조선시대의 몇몇 군왕이나 왕세자의 초상화는 이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전설상의 시조의 수용 역시 한결같이 이 추사 방식에 의거하였다.

모사란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본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신본을 그릴 때에 일컫는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어진 [御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곳 경기전 어진박물관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모사본이라고 하네요. 어진이 훼손되어 진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하네요.

사진을 찍기가 뭣해서 없지만,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지난날 국사책에서 본듯한 기억이 나네요.

이밖에도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어진도 몇 가지가 있었는데, 거의 추사본이라고 하더군요. 만 원짜리 종이돈의 주인공인 세종대왕 어진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추사본!

왕의 초상화를 어진이라고 일컫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정확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추측하여 비슷하게 그린 것이 많았다는 것도 놀랐다.


경기전에는 어진박물관도 남달랐지만, [전주사고]란 곳도 기억에 남는다.

사극 드라마에서 흔히 봤던 것 가운데 하나가 왕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정사를 펼때, 그 이야기들을 낱낱이 곁에서 받아적던 사관이 있었지요?

그 사관이 기록한 것들을 한데 묶어서 그 시대 왕의 실록인데, 조선 왕들의 이런 기록들을 모은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지요.

이 전주사고는 바로 그런 실록들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하네요.


이 왕조실록은 똑같은 것으로 여러 권을 만들어서 온나라 곳곳에 따로 보관을 했다고 해요. 혹시라도 잃어버리거나 훼손되었더라도 그 기록이 어느 사고에라도 남아있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 한양, 충주, 성주, 전주에 따로 보관을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유일한 실록은 14개월 만에 조정에 전달되어 다시 한양,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고,  전주사고의 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어있다고 하네요.


이 실록을 한양에서 이곳으로 옮겨올 때에도 예를 차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이 들었다고 하네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왕과 관련된 것들은 책 하나를 옮긴다고 해도 너무나 겉치레를 하지않았나 싶기도 해요. 그 시대엔 다 그랬겠지만 말이에요.



이곳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


아무튼 전주한옥마을에 가서 그나마 가장 보람된 건 경기전 안에 있는 어진박물관과 전주사고를 본 것이었네요.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예종대왕의 태실도 있었군요.

우리가 사는 곳 가까이에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 있지요.

세종대왕의 아들들의 태가 묻혀있는 곳이지요.

규모가 꽤나 크지요.

이곳 전주 경기전 안 뜰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 있답니다.

많이 봐왔던 풍경이라 익숙해서 그런지 무척 반가웠답니다.

그런데 가족나들이를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식구 가운데 어떤 아주머니가 이런 말을 하네요.


"하이고 별 걸 다 묻어놨네."

예종대왕 태실을 보고 하는 말이었어요. 저런......그 말에 왠지 화가 나기도 하더군요.

보는 이에 따라 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고 자랑거리이기도 한 데 말이에요.

예부터 왕가에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곱게 싸서 터 좋은 곳에 묻어서 안녕을 기리기도 했으니까요.




예종대왕 태실과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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